집안의 경사를 이웃과 함께 하던 풍습
지금은 필리핀 대표 외식문화로 자리잡다
필리핀에서는 기쁜 일, 축하해줄 일 등 마을 단위의 경사가 있는 날이면 꼭 돼지 한 마리씩 잡곤 했다.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춘 식문화이지만 옛날엔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집 딸이 결혼을 한다든가, 그 집 아버지가 회갑잔치를 한다든가 큰맘 먹고 돼지를 잡곤 했다. 물론 소는 살림 밑천이니 절대 잡을 수 없고, 돼지 역시 부담스럽긴 매한가지이나 좋은 일은 남들과 더불어 ‘통크게’ 축하해야 한다는 우리 민족 특유의 공동체정신이 밑바탕 된 식문화이기도 했다.
한데 우리나라는 그래도 최소한 가축에 대한 예의가 있었다. 충분히 다 자란-그렇다고 절대 노돈(老豚)은 아닌- 돼지를 주로 잡았다. 아직 어미젖도 채 떼지 못한 어린 것의 목을 시퍼런 칼로 도축하는 것은 즐기지 않았다. 물론 ‘맛있는 걸 먹기 위해 뭐든 다 하는’ 작금의 우리나라에서는 어릴수록 잡내가 없고 연하며 맛이 좋다는 야만적인 믿음아래 ‘애저(어린 암퇘지)’를 비싼 값에 유통시키고는 있다만... 무튼 감성적인 사족은 이쯤에서 각설하고. 필리핀은 돼지를 잡을 때 어린 돼지를 절대적으로 선호한다. 이름만 들어서는 작은 동물 같지만, 5킬로그램도 안 나가는 3주짜리부터 연령이나 무게가 그 두배는 되는 놈까지 다양하다.
어미의 젖밖에 먹지 않은 새끼돼지를 아주 어렸을 때 도축해서 통째로 구워먹는 것을 가리켜 ‘레촌’이라 한다. 스페인과 중국에서도 즐겨먹는 요리로, 이 두 나라의 문화가 만난 필리핀에서는 생일 등의 축하 자리나 새해 축제, 각종 행사와 모임에 빠지지 않는 대표 음식이다. 열대 허브로 양념하여 꼬챙이에 꿰서 숯불 위에 굽는다. 새끼돼지의 뱃속을 ‘타마린드’라는 상록식물 잎으로 가득 채우고 버터소스나 코코넛오일을 발라서 구워내는 것이 일반적인 레시피다. 잘 구워진 레촌일수록 붉은 빛이 감돌며 반짝이는 윤기가 돼지의 전신에 돈다.
레촌의 별미는 숯불에 오랫동안 구워내서 기름기가 쫙 빠진 바삭한 껍질이다. 잡내 하나 없이 담백하며 식감은 마치 과자처럼 바스러져 버린다. 노릇하게 익은 하얀 살코기에는 구수한 담백함과 달콤한 감칠맛이 공존한다. 식감은 대체적으로 크리미하고 살짝 젤리 같은 질감도 느껴진다. 또 돼지 뱃속에 든 속이 노천 불에서 구워지면서 그 향기나 훈제 연기의 풍미까지 모두 빨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