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유적 : 대마도와 조선의 역사가 함께 흐..
  • 1. 하치만궁

    하치만궁은 이즈하라 항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어, 배에서 우르르 내린 한국 관광객들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대부분 가이드를 낀 투어, 패키지 상품으로 많이 오기 때문에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 아래 쪼르르 앉아있는 등산복 차림의 한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신사 입구에는 커다란 도리이가 있고, 여러 신사로 나뉘는 갈림길에는 간이 약수대가 보인다. 신사마다 음용 가능한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대부분 입을 헹구거나 마시는 모습이 연출됐다.
    하치만궁신사, 우노도신사, 텐진신사, 와카미야신사 4개의 작은 신사가 모여 있는 곳이다. 각각의 신사에는 신사사무소와 신마(神馬), 그리고 주렁주렁 소원을 빌어 목패를 달아놓는 곳이 있다. 목패에는 한국어가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 어떤 곳에서는 오히려 한국어가 더 많기도 했다. 신사는 전체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였고, 볕이 잘 들고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이 많아 앉아 쉬기에도 좋았다.
      
      
    2. 최익현순국비

    남대마도 이즈하라항구에서 길을 돌아서면 수선사(슈젠지)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키 큰 고목들이 간신히 목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돌담을 높게 쌓아 이어진 길, 끝에 수선사 입구에 현판석이 보인다. 이곳에는 애끓는 조국애를 가슴에 새기며 통탄해하던 최익현 선생의 마지막을 추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에 의한 단발령을 거부하며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고 외치던 최익현 선생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전라도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키며 일제에 저항했다. 하지만 1906년, 일제에 체포된 선생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대마도로 끌려오게 된다. 그 후로 심신의 병이 깊어져, 두 번 다시 조국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이곳 대마도에서 눈을 감게 된 것. 대마도에 살고 있던 백제 사람이 선생의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 수선사에 나흘간 안치시켰다가 부산으로 이송됐다. 지금의 순국비는 대마도에서 여생을 보냈던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3.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 타케유키 백작과 결혼했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됐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정혜가 있었는데, 이 무렵 덕혜옹주는 지병이 심해져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딸과 헤어져 많은 시간들을 우울 속에서 보내야 했다. 딸 정혜 역시 결혼 실패로 방황하다가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됐다.
    1955년 이혼 후 우여곡절 끝에 1962년 귀국한 덕혜옹주는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했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으로 기구했던 덕혜옹주의 흔적을 잠시나마 되새겨 볼 수 있다.
      
      
    4. 고려문(조선통신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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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마도는 일본 본토로 가기 전 조선통신사가 거쳤던 곳이다. 하여 대마도 곳곳에서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를 가로지르는 하천 난간에는 조선통신사행렬을 묘사한 그림이 여러 개 걸려 있다.
    이즈하라시청 왼편에는 현립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이 있다. 자료관에는 조선에서 가져 온 종과 조선통신사행렬도, 조선왕의 교지 등 대마도의 인문·자연자원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다. 또 민속자료관 입구에는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해 지은 고려문과 1992년에 건립한 조선통신사비가 보인다.
    조선에서는 1811년까지 일본에 300~500명 규모로 12번의 조선통신사를 파견했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들인 돈이 당시 돈으로 100만냥, 지금 화폐로 환산하면 약 5,580억 정도라고. 또 이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기간만 평균 3년에 달했다고 하니, 조선통신사는 과연 귀빈 중의 귀빈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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