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디가 푸릇하게 박힌 너른 마당을 낀 갈색 건물 한 채, 전형적인 제주 농가식당의 겉모습. 일반적인 식당처럼 아주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안에는 의외의 맛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들어선 내부 모습은 겉모습만큼이나 예상 가능한 메뉴를 취급하고 있었다. 생선구이(고등어, 갈치)와 산채비빔밥, 바지락칼국수, 콩국수, 해물파전 등을 팔고 있는 모습. 그런데 사이드메뉴 쯤으로 보이는 ‘차(茶)’란에 당근즙과 유자차가 떡하니 들어서 있다. 유자차는 그렇다치고 식당에서 당근즙을 팔다니, 평범한 식당과는 어울리지 않는(?) 유니크함이다.
그제야 가게를 찬찬히 둘러보니 한켠에서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며 서있는 녹즙기가 보인다. 그 옆에는 짜고 남은 찌꺼기를 걸러내고 있는 페트병이 서있고, 진한 주황색 물이 한 가득 차올라 있다. 당근을 짜고 남은 물이리라, 마시면 왠지 얼굴에 물이 들어버릴 것만 같은 진한 주홍이다. 저런 것이 바로 건강의 색이 아닐까.
이상하게 메인메뉴보다 사이드메뉴가 더 유명한 집이지만 그래도 심한 공복감에 시달리며 찾은 터라 꾸역꾸역 밥도 시켜본다. 갈치보단 고등어를 더 좋아하지만 갈치는 100% 제주산을 취급하는 반면, 고등어는 제주산에 노르웨이산도 섞여있어 믿음 가는 쪽을 택한다. 제주산 갈치는 워낙 유명하니까 아무리 못해도 평타 이상은 할거라는 일말의 기대감과 함께.
예상은 그대로 적중, 속살이 통통하게 차오른 갈치는 바삭하고 촉촉한 식감을 자랑해주시고 고소한 맛은 더했다. 배가 고팠기에 객관적인 평가라 자부할 순 없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맛이었다. 따로 남은 당근즙이 이 집의 대미를 장식해주는데, 한 잔 그득히 짜낸 당근즙은 일단 색감부터가 합격점. 무슨 물감을 탔나 싶을 정도로 밀도 높은 색감, 벌써부터 건강해지는 이 기분은 뭘까. 그렇다면 그 맛은? 우선 입에 농밀하게 착 감겨오는 액체의 식감이 주스와 즙의 중간 단계 정도로 아주 알맞다. 너무 걸쭉하면 마시기가 불편하고, 너무 묽으면 당근이 들어간 건 맞나 싶을 정도로 불신의 싹이 피어 오를 테니.
밀키하면서도 향긋한 당근의 맛이 입안에 오래 남는다. 맥주만 풍미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당근즙도 풍미가 살아있을 수 있단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파우치 형태로 판다면 한 박스 사서 가져오고 싶을 정도. 이따금씩 몸이 축축 늘어질 때면 으레, 자주, 떠오르는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