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진주는 영남과 호남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임과 동시에 왜구의 노략도 유난히 잦았다. 일찍이 선조들은 성벽을 쌓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고, 허물어진 성벽을 다시 쌓을 때마다 축조의 노하우는 늘어만 갔다. 그래서인지 1437년 관민이 합세하여 완성시킨 진주성의 모습은 가히 압도적으로 웅장했다.
진주성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진주대첩이 일어났던 곳이다. 두 차례의 격전 끝에 조선군은 비록 전멸하였지만, 심각한 수적 열세를 보였던 1차 전투의 승리를 비롯해 왜군에게 막대한 손상을 입힌 싸움이 되었다. 성 앞을 흐르는 남강, 뒤로는 병풍처럼 지리산이 지키고 서있던 까닭에 접근 자체가 여의치 않았던 진주성의 특수한 입지는 난공불락의 요새에 가까웠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차전 직후, 2차 복수전에 대한 특명을 내렸다. 군력을 보강하고 1차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특수한 병기로 무차별 공격을 단행하게 한 것이다. 진주성의 군사들이 모두 죽고 난 후에도 남아있는 군·관·민 6만 명까지 불태워 죽이고 가축까지 도살시킨 사실을 보면, 1차전의 결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얼마나 큰 치욕을 안겨줬는지 짐작할 만하다.
처절했던 역사의 현장, 진주성은 최근에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중 1위를 차지했다. 남강 물줄기 따라 축조된 성곽 자체가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기도 하거니와, 역사적 전투가 있었던 호국성지로 그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또 진주성 안에는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의기 논개의 넋이 담긴 의암 바위도 우뚝 솟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