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유적 : 왜군에 맞서 싸우고, 왜국에 의..
  • 1. 충렬사


    계단 위에서 푸른 하늘을 등지고 선 충렬사가 보인다. 너른 품으로 속세의 중생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것만 같은 사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958년 남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후, 1606년 충무공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선조의 왕명으로 제7대 통제사 이운룡이 세웠다. 그 후로부터 역대의 수군 통제사들이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본전과 정문, 중문, 외삼문 등 9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경내에는 오래된 비석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통영 충렬사는 1865년 서원철폐령 때에도 유일하게 존속시킨 법통사당으로 1945년 광복을 맞이해 이승만 대통령, 김구 선생 등 많은 애국지사들이 참배해 건국의 결의를 다진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뛰어난 무공을 칭찬한 명나라 임금 신종이 충무공에게 내린 8종류의 유물 15점 팔사품(八賜品)이 보관되어 있다.
     
    2. 당포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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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덕항에 위치한 약 14.969평방미터의 당포성지는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유리한 천혜의 지형을 가지고 있어, 이순신 장군이 통제영에 있을 때 왜적을 물리치는데 활용했다.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 63호로 지정된 이 성은 고려 공민왕 23년(1374) 때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최영 장군의 지휘아래 병사와 백성들이 십시일반 쌓아올렸다. 고려조 때에도 왜구의 침략에 맞서 국토를 수호하는데 일조했던 전승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도 전라 좌수영과 경상 우수영의 연합함대가 왜선 21척을 격침시킨 당포해전이 펼쳐진 곳이다. 잘 만든 성 하나가 오랜 세월 동안 전시 때마다 국토와 백성들을 지켜준 셈이다. 현재는 성지만 남아 오가는 객들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3. 용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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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이라는 승려가 미륵산 중턱에 절을 짓고 이름을 정수사라 하였다. 그 뒤 고려 원종 때 산사태로 허물어진 것을 3년 뒤 자윤, 성화 두 승려가 미륵산 제3봉 아래로 자리를 옮겨 짓고 이름을 다시 천택사라 바꾸었다. 하지만 이마저 1682년에 화재로 소실되자 1752년에 벽담이라는 자가 다시 짓고 이름을 용화사라 불렀다. 단어적인 의미의 용화사는 1752년에 처음 지어진 것이지만, 역사적인 의미로 봤을 때는 그 유래가 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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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인 보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미륵불좌상을 봉안한 용화전, 탐진당, 적묵당, 해월루 등의 목조건물과 종루가 들어서 있다.
      
      
    4. 통영 삼도수군통제영

    이순신과 엮이고 싶어 하는 지역은 아주 많다.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만 해도 전국에 30곳이 넘고, 이순신과 ‘옷깃만 스친’ 인연이라도 닿은 지역은 저마다 ‘이순신의 고장’이라며 그를 앞세운다. 허나 통영은 부로 추켜세우지 않아도, 이순신과 각별한 인연으로 얽힌 땅이다. 통영이란 이름 역시 ‘통제영’에서 나왔고, 여기서 조선 최초 삼도수군통제사는 이순신이라는 점까지 미루어보면 통영시, 특히 통제영은 이순신 그 자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통영을 경상, 전라, 충청 3남 바다를 통틀어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삼도수군통제영의 시초는 한산도라고 봐야 한다. 1593년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한산도에 진영을 꾸렸기 때문이다. 허나 한산진영은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조선수군이 왜적에게 물자와 정보가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불태워졌다. 이후 전라좌수영, 경상우수영 등으로 옮겨지다가 마침내 통영으로 넘어오게 된다. 그때부터는 진영의 개념을 넘어 하나의 군사도시로 기능하게 된다. 그때부터 고종 1895년 통제영이 닫히는 순간까지 300년 남짓한 세월 동안 통영 문화를 이끈 것이 바로 이 통제영이다. 3세기 동안 ‘통영 르네상스’의 중심에 핀 꽃이었던 셈이다.
        
     
    5.  해저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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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저터널은 일제강점기 1932년 11월 20일,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로서는 길이 438미터의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이 주목받게 됐는데, 당시 일제가 토목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다 위로 다리를 놓으면 간단한 문제일 텐데, 굳이 왜 바다 아랫길까지 내려가 터널을 뚫느냐는 것이었다. 해서 이보다 더욱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는 건 하나의 야담이다. 그 야담에 의하면 해저터널 부근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엄청난 수의 왜적들이 빠져 죽은 곳이다. 일제는 이 바다 위에 다리를 놓게 되면 그들 조상의 영혼을 밟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터널을 파기로 했다고. 야담일 뿐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어두침침한 이 터널을 지나가면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해저터널이라 해서 거가대교처럼 바닷 속에 있는 터널은 아닌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찾아왔다가 잔뜩 실망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해서 그저 바다 밑으로 난 길일 뿐임을 알려둔다. 산중 터널을 지나면 나무와 꽃이 보이지 않듯 이곳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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