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범어사
여행기자, 전문 여행가들이 죽기 전에 가야할 국내 여행지를 선정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부산의 대표적인 사찰,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로 꼽히는 이곳은 해동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의 하나로 기록되며, 신라 문무왕 18년(678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이곳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고승대덕(高僧大德)과 도인을 양성, 배출한 수행사찰로 의상대사(義湘大師)를 비롯하여 원효대사(元曉大師), 표훈대덕(表訓大德), 만해 한용운선사(萬海韓龍雲) 등의 고승들이 수행, 정진한 우리나라의 명찰(名刹)이자, 1950년대 동산스님이 주도한 불교정화운동으로 한국근대불교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범어사(梵漁寺)’는 ‘하늘의 물고기’라는 뜻으로 금빛 나는 오색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금샘의 전설이 깃든 금정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 이름 붙여졌다.
임진왜란으로 전체가 소실되기 전까지는 국가의 대찰로 그 규모가 매우 컸었다고 전해진다.
광해군 5년(1613년)에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건한 이후로 크고 작은 중건과 보수 과정을 거쳐 오늘의 모습을 이루었다. 현재는 보물 제434호인 대웅전과 보물 제250호인 삼층석탑을 비롯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석등, 일주문, 당간지주, 동서 삼층석탑 등 많은 문화유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전각과 요사, 암자와 누각 등이 경내를 채우고 있다.
산성마을에서 범어사까지 이르는 트레킹 코스는 울창한 숲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데 특히 계곡에 무리지어 자라난 등나무 군락지는 천연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사이로 소나무, 팽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어 절경으로 꼽히기도 한다.
사찰을 에워싸는 듯한 파도의 숨소리와 해안절경이 쏟아지는 곳. 그동안 산사의 비경에만 익숙했던 이들에게 ‘해동용궁사’는 바다의 외로움도 자비롭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의 하나로 고려시대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懶翁和尙)이 1376년 창건한 사찰이다. 나옹화상이 경주 분황사(芬皇寺)에서 수도할 때 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하루는 꿈에 용왕이 나타나 봉래산 끝자락에 절을 짓고 기도하면 가뭄이나 바람으로 근심하는 일이 없고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이곳에 절을 짓고 산 이름을 봉래산, 절 이름을 보문사(普門寺)라 하였다.
1590년대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1930년대 초에 통도사의 운강(雲崗)이 중창하였다. 1974년 부임한 정암(晸菴)이 관음도량으로 복원할 것을 발원하고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꿈에서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하여 절 이름을 해동용궁사로 바꾸었다.
긴 입구를 지나 십이지상이 보이고, 그 아래 108계단 초입에 까만 손때가 잔뜩 묻어있는 포대화상의 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배와 코를 만지면 득남한다는 속설 탓.
단일 석재로는 한국 최대의 석상인 약 10m 높이의 해수관음대불, 동해 갓바위 부처라고도 하는 약사여래불이 있고,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굴법당·용왕당(용궁단)·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옆에 있는 미륵전에는 창건 때부터 모신 미륵좌상 석불이 있는데 이는 득남불이라고 불리고 있다.
국내사찰 중 가장 먼저 해돋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바다와 용, 관음대불이 조화를 이루어 영험한 기운을 내는 곳이라 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현몽을 얻고 소원을 이룰 수 있다한다.
항상 국내·외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부산의 대표적 명소이다.
부산의 대표적 산행 코스로 사랑받고 있는 금정산. 그 고행의 끝을 알리는 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로 길이 1만 7336m, 면적 21만 6429평의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으로써의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때 적을 막기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오래된 문헌 속에 속속 등장함으로 축조 시기가 엇갈리고 있으며, 그 시기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약 4km의 성벽만이 남아 있는데, 금정산 꼭대기에서 서남으로 계곡을 따라 축성되었으며 동서남북 사방의 성문과 수구문·암문 등의 시설이 있다. 그리고 1972년에 유실되었던 동문과 남문이, 1974년에 서문과 수구문 및 망루가 복원되었다.
동쪽 성벽은 산꼭대기부터 500∼600m의 분수령을 따라 험준한 지형과 암벽을 이용하여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 성벽은 산꼭대기에서 구포방면의 능선과 계곡을 건너 동쪽 성벽으로 이어지고 있다.
본 명칭은 동래산성이었으나 금정산에 위치해있다하여 금정산성으로 불리고 있으며 대표적인 볼거리로 사방의 성문을 들 수 있는데, 동문은 금정산 주능선의 잘록한 고개에 자리하고 있으며 전망이 뛰어나 망루로서도 손색이 없다. 서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계곡에 자리하고 있는데, 낙동강에서 대천을 따라 산성마을 초입에 위치해있다. 남문은 동제봉과 상계봉을 잇는 능선상의 잘록한 고개에 있으며 고당봉이 정면으로 올려다 보이며, 4대문 중 가장 투박하고 거친 외형을 지녀 금정산성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북문은 범어사와도 인접해있다.
하지만 등산로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곳곳이 몸살을 앓고 있어 이로 인한 복원 사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4. 충렬사
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충렬사는 동래구 안락동 838번지에 있는 사우(祠宇)로 임진왜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부산진첨절제사 정발(鄭發)을 비롯한 부산지역 호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605년 동래부사 윤훤(尹暄)에의해 처음으로 건립되었고, 1624년(인조2년)에 선위사 이민구(李敏求)의 청으로 사액(賜額)이 내려져 본래의 명칭이었던 송공사(宋公祠)에서 충렬사(忠烈祠)로 명명되었다.
1652년(효종3년)에는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에 의해 동래읍성 남문 밖의 농주산이었던 본래의 터전에서 지금의 충렬사 자리로 이전하면서 안락서원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1709년(숙종35년)에는 옛 터전에 별사를 지어 그 시기에 함께 전사한 다른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시다가 1736년(영조 12년), 충렬사로 옮겨 함께 모시기 시작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충신 37인, 효열(孝烈) 4인의 봉향을 이유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무사히 보전되었다.
충렬사에는 사우와 소재당 사이에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담장을 설치하면서 건립한 동문·서문·중문과 충렬사 본전, 의열각, 기념관, 정화기념비, 송상현공 명언비, 충렬탑 등의 유적이 있다.
특히 ‘충렬사 제향’은 호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매년 5월 25일에 지내는 제사를 뜻하는데 현재도 진행하고 있으며, 이는 부산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봉행하는 의의를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