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유적 : 500년 조선왕조 수도의 위엄을..
  • 1. 경복궁

    경복궁은 조선왕조 때 만들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첫 번째로 만들어진 곳이며, 현재까지 규모와 건축미에서 최고의 궁궐로 손꼽히는 곳이다.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리며 번영할 것’는 뜻을 가진 ‘경복(景福)’이란 이름은 태조의 명으로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개국 3년만인 1395년에 390여 칸으로 완공했으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등 뒤로는 주산인 백악산, 좌우로는 낙산과 인왕산을 두었다. 앞쪽으로는 남산과 내수인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으니, 지금으로 치자면 천하제일의 금싸라기 땅이었던 셈이다.
    작명의 기운 때문이었는지 새 왕조는 무려 600년이나 이어졌지만 경복궁의 역사는 그 길함을 이어가지 못했다. 경복궁 강녕전의 작은 화재를 시작으로 임진왜란 때 전소되자, 경복궁의 터가 길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에 법궁의 지위를 넘겨준 채 270여 년 동안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지만, 또 한 차례의 화재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려갔다. 90년대 이후 총독부 건물 철거와 함께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으나, 옛 모습이 많이 소실된 점이 안타깝다.
        
     
    2. 창덕궁

    보통은 궁궐은 양옆으로 위세 좋게 뻗쳐나가 웅대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것을 최고로 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자금성처럼 보자마자 압도되는 장엄한 궐 말이다. 하지만 이 장엄함을 얻는 과정에서는 산세를 깎아 평지로 치환시키는 엄청난 자연의 희생이 필요하다. 우리 선조들은 자연이 희생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예컨대 산이 있고 바위가 있다면, 그를 부러 깎지 않고 그 끝에 살며시 건물을 얹어 놓은 듯한 조화로운 느낌을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창덕궁은 산을 깎지 않고 오히려 산세에 최대한 의지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 응봉 자락에 터를 잡은 창덕궁은 자연과 요모조모 잘 섞인 채 지어놨기 때문에 연못과 정원이 다른 궁궐보다 훨씬 많다. 이곳에는 자연히 정자도 많이 세워졌고, 따라서 임금이 쉴 곳이 많았던 셈. 왜 조선의 왕들이 사랑했던 궁궐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 경희궁

    경희궁이 있던 자리는 본래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사저였으나 이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말에, 광해군이 사저를 빼앗아 임시 궁궐로 지은 것이다. 정사에는 유사시 궁궐로 활용하기 위해 광해군이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정원군의 기세를 누르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 후 화재로 인한 소실,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건물 이동 등으로 훼손되다가 일제강점기 때는 본격적으로 건물 대부분이 헐리거나 일본인학교 교실로 사용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기구한 배경으로 탄생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숱한 곡절의 세월을 버텨온 것이다. 1988년 홍화문을 옮겨오고 숭정전을 다시 지으며 복원사업이 진행됐다. 숭정전은 경종, 정조, 헌종 등이 즉위식을 거행했던 경희궁의 정전이다. 그밖에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박문사 , 자정전, 태령전 등이 복원됐다.
        
     
    4. 창경궁

    1418년 세종 즉위 후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본래 이름은 수강궁이었다. 세종 원년에 태종이 잠시 거처했으며 이후로는 왕후 등 왕실의 어른들이 머물렀다. 유교 국가 조선의 ‘효’ 사상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장소였던 아담한 궁궐. 규모 면에서 다른 궁궐보다 작을지 모르나, 창경궁의 정전이나 국보 226호인 명정전은 현존하는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래되어 가치가 남다르다.
    창경궁은 경희궁과 함께 일제에 의해 가장 훼손을 많이 당한 궁궐이다. 화재나 전쟁으로 인한 소실은 유적지의 숙명과도 다름없으니 차치하지만,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용도 변경되고 궁궐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사실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이 멋스러운 궁궐이 한때는 유원지이고 동물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당시 조선왕실로서는 능욕도 그런 능욕이 없었을 것. 지금은 당시의 모습을 복원하고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상처는 곳곳에 남아있다. 그래서 더 애틋한 궁궐이 아닐까.
        
     
    5. 덕수궁

    고종이 사랑했던 곳인 만큼 그가 승하한 후 덕수궁 역시 궁궐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채 쓸쓸히 남겨졌다. 궐을 재단장하여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1933년 무렵. 대부분의 궁이 그렇듯 덕수궁 또한 모두에게 외면 받고 역사 속으로 유폐 당한 시간이 길었기에, 남겨진 모습이 무척 쓸쓸하다. 현재 경내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 중화전, 광명문, 석어당, 준명당, 즉조당, 함녕전, 덕흥전 및 석조전 등에 불과하다. 화려한 시절을 간직했던 대형 궁궐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흔적이다. 그러나 마치 한 국가의 흥망을 보는 것처럼 비애 어린 궐의 운명적 이야기가 깃들어 있어, 이곳은 더없이 소중하다.
        
     
    6. 운현궁

    종로3가에서 낙원상가를 지나는 대로에서 기나긴 한옥 담이 시작된다. 기왓장이 켜켜이 섬세하게 쌓인 지붕 끝, 그 담 너머에는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저택이 있다.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마주한 바 있어 특히 익숙한 그 집.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조선 말 정치의 흥망이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뿐만 아니라 경복궁 중건, 서원철폐, 세도정치 개혁 등 역사에 길이 남은 대원군의 업적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운현궁의 현존 건물은 노안당, 이로당, 노락당이 전부다. 한때나마 조선 후기 최고 권력가들이 모여 개혁 정치를 도모했으며, 궁궐에 견줄 만큼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던 운현궁이지만 이제 그 모습은 역사 속에만 남아 있다.
     
    7. 봉은사

    도로변, 초고층 빌딩 사이에 둘러싸인 비밀의 고찰 봉은사. 세월 따라 만수강산이 변해가며, 자연이 있던 자리를 대신 메운 빌딩들 속에서도 제 자리를 꼿꼿이 지켜온 모양이다. 고찰 바깥을 병풍처럼 에워싼 그림이 다소 이질적이지만, 세속에는 아랑곳 없다는 듯 봉은사는 호젓한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사바세계에 찌든 인간 군상이 세속의 때를 씻고 싶은 그 순간, 언제든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화려한 단청과 꽃무늬 창살이 어여쁜 법왕루와 봉은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을 지나면 높이 23m에 달하는 거대한 미륵대불이 서있는 미륵전이 나타난다. 그 아래 옹기종기 모여 정성스레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보인다. 저마다의 염원을 두 손 가득 담아, 성심껏 기도하는 모습이 갸륵하다. 부처가 이들을 굽어 살펴,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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