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수사
통도사의 말사인 문수사는 신라 때 창건되었으나 누가 창건하였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1799년(조선 정조 23) 편찬된 <범우고>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문수사는 상당히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으리으리한 규모를 가지고도 증개축을 통해 계속해서 건축물을 확장해가는 비대한 절은 바로 앞까지 차가 닿을 수 있도록 길도 친절히 닦아놓기 마련이다. 잭은 그런 친절이 싫다. 일찌감치 차도는 끊기고 말아, 20분을 꼬박 험한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문수사의 불친절한 첫인상이 퍽 마음에 들었다. 자그마한 규모의 사찰은 창건자가 누군지 증명할 수 없고 다만, 불교문화가 꽃 피웠던 신라 때 세운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대웅전과 범종각, 산신각, 종무소,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신각 뒤에는 화강암으로 제단을 쌓고 모신 대형 불상이 앉아있다.
2) 반구대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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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로 깎아 놓은 듯한 기암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자라난 나무가 이 숨은 비경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바로 이곳, 반구대 일대의 시연댐 서쪽 기슭의 암벽에 반구대 암각화가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내륙 깊숙한 지역에 선사시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니, 다소 의아할 법 하지만 옛날에 울산 일대는 바닷 속에 잠겨 있었던 지역이라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고래사냥 그림을 통해, 태화강 상류 지역은 바닷물이 드나들었던 해안가 지역이었음을 반추해본다.
암각화가 새겨진 암벽 아래로 댐이 있어, 강수량이 많은 여름철이나 댐이 가득 찰 때에는 수면 밑으로 잠겼다가 물이 마르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사이에 둔 물 때문에 육안으로는 자세히 살펴보기 힘들고, 건너편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암벽 언저리를 더듬어볼 수 있다. 고래, 개, 늑대, 호랑이 등의 짐승부터 사람의 모습까지 다양한 생물종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는 수렵문화를 이뤘던 선사시대 생활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된다.
3) 대왕암공원
동백꽃 사이를 지나 약 1km 가량 이어가는 소나무의 짙은 숲은 미로처럼 끊임없으며, 마치 호젓한 산사를 찾아가는 듯한 오솔길의 느낌이다. 해풍을 피하기 위해 하나둘 심었던 어린 소나무들은 세월과 함께 훌쩍 자라, 늠름하고 품위 넘치는 장송의 기백을 뿜어낸다. 내밀하게 얽힌 솔잎 사이로 바람을 가둔 덕에 따뜻했던 걸음도 송림과 함께 끝나고, 이내 홀연히 열린 푸른 바다와 그 곁에 어우러진 기암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신라 문무왕 왕비가 대왕이 승하한 후, 함께 호국룡이 되어 이 바다에 잠겼다는 전설을 간직한 울산 대왕암. 철근과 나무를 이은 고운 빛의 구름다리를 건너면, 우직하게 떠오른 대왕암에 닿을 수 있다. 그곳에 우뚝 서니, 사방으로 탁 트인 바다와 그 끝에 금을 그은 듯 어렴풋이 펼쳐진 수평선이 보인다. 이곳이 간절곶 못잖게 일출 장소로 유명한 곳이라 했던가. 화폭에 끌어다놓으면 대단한 작품이 나올 듯한 절경을 보니, 결코 그 말이 허명은 아닌 것 같다.
4) 석남사
가지산 남쪽 자락에 놓여 있는 석남사. 가지산이 별칭으로 ‘석남산’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러한 연유에 따라 사찰 이름도 덩달아 석남사로 지어진 게 아닐까. 통도사의 말사로 비구니들의 참선수련 도량으로도 유명한 이곳에는 석남사 부도, 삼층석탑, 석남사 수조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고 있다. 대웅전, 극락전 등 30여동 건물로 이루어진 석남사는 한겨울 눈이 내려 온 사찰이 하얗게 뒤덮일 때 가지산과 어울려 환상적인 비경을 자랑한다.
여느 사찰들이 그렇듯, 석남사 역시 임진왜란의 화마를 피해가지 못하고 전소되어 조선 후기 재건되었다. 그러나 이후 한국전쟁 과정에서 또 한 차례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최근까지 재건된 흔적이 엿보여 고풍스러운 옛 멋을 느끼긴 힘들지만, 비구니 사찰로 운영되는 까닭에 곳곳이 매우 정갈한 느낌이다.
5) 천전리각석
천전리각석은 국보 147호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이며, 인근에서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보다 조금 더 일찍 발견됐다. 둘 다 바위에 그림을 그린 암각화 형태지만, 천전리 암각화가 각석(刻石)이라 불리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발견 당시, 암각화보다 신라시대 명문이라는 점에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천전리 각석은 억겁의 시간 동안, 세월과 함께 마모·퇴화되어 정확한 연대를 추측하기 어렵지만,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아우르는 모습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각종 동물 문양과 동심원을 비롯한 기하학적인 문양이 바위 상부에 새겨져 있고, 하부에는 돛단배와 말, 용 등의 그림과 신라시대 행렬 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배가 항해하는 모습, 명문 등도 함께 새겨져 있어, 신라 때의 생활양식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상당한 역사적 보존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림과 함께 새겨진 글자는, 지금은 상당 부분 훼손되어 300자 정도 확인할 수 있지만 최초에는 800여 자 이상이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6) 작괘천
▲부드러운 곡선의 바위모양이 인상적인 작괘천. 저 뒤로 한발 물러서 있는 작천정도 보인다. Copyright ⓒ울주군청
만물이 깊은 잠에 빠지는 추운 겨울철, 더 특별한 볼거리가 있으니 바로 울주의 명물 작괘천 되겠다. 수백 명도 앉을 수 있을 듯한 너른 바위마당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고, 이곳저곳 움푹하게 패였다가 돌연 부드럽게 돌출되는 모양새가 상당히 독특한 모습이다. 하물며 그 사이를 부드럽게 스치듯이 유유히 흐르는 물길을 보고 있자니, 온세상의 시름도 잊을 듯한 평화가 찾아온다. 이 재밌는 형상이 마치 술잔을 걸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작괘천(酌掛川)이란 이름이 붙었다. 고려말에는 충신 정몽주가 이곳의 경치와 함께 수학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언양지방 3·1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화강암 한 덩이 한 덩이, 암반 곳곳에 생겨난 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아무리 작은 홀에도 저마다 물이 고여 있다. 이렇듯 암반 사이의 구멍을 서양식으로 ‘포트홀’이라 하는데, 전국 어디에도 작괘천만큼 파인 길이와 깊이 모두 다른 구멍 수백 개가 한곳에 모인 경우는 없다.
작괘천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기세 좋게 들어서 있는 정자, 작천정. 현판에는 ‘격류는 수억년간 바위를 갈고, 바닥에는 수만가지 그릇을 새겼다’는 뜻을 가진 한자가 새겨져 있다. 백 년 전에 세운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그때도 그 아름다움은 지금처럼 대단한 것이었나 보다.